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섬 ‘유토피아’는 모두 현존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이 만들어낸 이상향이었다. 정보기술 시대의 지배자가 된 실리콘밸리는 지금까지 상상으로만 끝났던 이상향 논의를 구체적 형태로 실현시키려 한다. 정부의 비효율성에 대한 불만과 첨단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함께 섞여 기술이 지배하는 자유방임주의의 ‘마이크로 국가’ 계획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낳은 새로운 실험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과 애플을 비롯한 기술기업과 이들을 지원하는 금융기업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정치인보다 더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대 기술기업들은 지상의 정부가 그들의 혁신의 속도를 따라갈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점점 더 국가의 법과 정치에 갑갑함을 느끼고 여기서 단호히 벗어나길 원한다.
레리 페이지 구글 공동창업자는 지난해 5월 구글 개발자 회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하고 흥미를 끄는 많은 일들이 있지만, 불법이라는 이유로 방해를 받고 있다”며 “기술 전문가로서 우리는 세상의 일반적 규범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것이 사회와 인간에 미치는 효과를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19일 유전자 기술기업 카운실의 창립자인 바라지 스리니바산은 실리콘밸리의 쿠퍼티노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실리콘밸리의 궁극적 미래는 정부의 관료주의와 비효율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미국 바깥에 기술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을 덩치가 크지만 낡고 시대에 뒤처졌다는 의미로 ‘마이크로소프트’에 비유한 그는 쇠퇴하는 거대 기업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스타트업’을 만드는 일은 국가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나 국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출발을 위해 ‘탈출’을 택할 수 있다”며 “이는 나쁜 정치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실험의 두 갈래, 분리주의와 해상공동체 건설
대안적 정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나마 가장 온전한 것은 분리주의 움직임이다.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가인 팀 드레이퍼는 지난 2월 25일 현재의 캘리포니아주를 제퍼슨, 노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센트럴 캘리포니아, 웨스트 캘리포니아, 사우스 캘리포니아로 분리하자는 ‘6개의 캘리포니아’ 캠페인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캘리포니아가 너무 큰 면적으로 이뤄져 운영에 효율이 떨어진다”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분리를 주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 가장 교육에 많이 투자하지만 교육 성과는 전체 50개 주에서 46위에 불과하고, 교정시설에 쏟는 돈도 가장 많지만 재범률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며 걷는 세금에 비해 성과가 형편없다고 비판했다. 다른 주보다 평균 인구가 6배 많으면서도 상원 의석은 2개에 불과해 미 중앙정치에서 캘리포니아가 과소대표되고 있다는 점도 거론했다.
이 운동이 7월 14일까지 80만7615명의 지지 서명을 받으면 오는 11월 주 차원에서 분리 찬반 투표를 하게 된다. 주의회가 분리를 승인해야 하고, 상원에 10개 의석을 만들어야 하는데 상원 내 민주당과 공화당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어 실현 가능성은 낮다.
국가 주권을 피하기 위해 공해 상에 ‘마이크로 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다. 케인스와 함께 경제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경제적 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의 손자 패트리 프리드먼은 2008년 페이팔의 공동창립자인 피터 티엘의 지원을 받아 ‘시스테딩 인스티튜트’(The Seasteading Institute)를 세우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 국가들을 세우려 한다.
시스테딩 인스티튜트가 계획하고 있는 떠 있는 도시는 석유시추선과 비슷한 형태로 모듈로 구성된, 이동할 수 있는 섬이다. 토지 임대료는 1㎡당 약 4000유로(약 578만원)로 정보기술산업을 비롯해 의료관광, 해상문화와 대안 에너지 체험관광 등이 수익 모델이다. 이 단체는 중미의 태평양 연안 폰세카만에 최초의 떠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온드라스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57개국에서 1200명의 시민이 참여 의사를 전해 왔다고 이 단체는 밝혔다.
이들은 영토국가의 법과 정치시스템이 문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여긴다. 자신들이 건국의 아버지가 되어 백지상태에서 새출발을 해 “인간에 내재된 타고난 재능을 해방시키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만들고, 병자를 치유하며, 바다를 되살리고, 대기를 청정하게 하고, 화석연료를 버릴 수 있도록” 새로운 통치시스템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이다.
랜돌프 헨켄 시스테딩 인스티튜트 사무총장은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최초의 떠 있는 공동체가 2020년 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며 “마이크로 국가들은 정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실험하는 개척자로, 이들의 성공은 세계 각지의 정부를 변화시킬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10일 말했다.
미국 이민법 개혁 논의가 진척을 보지 못하면서 고급 인재를 수혈받기 위한 우회로로 해상 도시를 세우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표적 단체는 ‘블루시드’(BlueSeed)로 실리콘밸리 인근에 세계 각지의 기술인력들이 취업비자 없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하프문베이에서 22㎞ 떨어져 미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해를 막 벗어난 바다 위에 거대한 해상 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이다. 이민법 규제를 받지 않는 기업 공동체로, 페리선으로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며 관광비자만으로 오갈 수 있다.
블루시드 홈페이지는 “전 세계 사업가들이 미국 취업비자를 받을 필요 없이 실리콘밸리와 가까운 곳에 기업을 세울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 약 900만 달러 이상을 모은 이 단체는 추가로 1800만 달러를 모은 뒤 2014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기술기업이 만드는 ‘자유방임주의’ 국가
정보를 지배하는 부유한 기술기업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해상 도시 집단은 어떤 국가의 주권에도 구속받지 않는 역외 공동체이다. 이들이 만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기술이다. 모듈 형태로 떠다니는 도시들에서는 세금도 걷지 않고, 전자화폐로 결제한다. 화석연료 대신 녹색에너지만을 사용하며, 물건 배달은 드론이 담당한다.
기술이 물적 토대를 이룬다면 그 토대를 움직이는 문화는 ‘자유방임주의’다. 자유방임주의는 경제와 개인의 생활 영역에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우파와 달리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관세와 세금이 없고 모든 형태의 부의 재분배를 거부한다. 정부의 역할은 국방과 외교, 사법 영역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자유방임주의는 최근 미국에서 힘을 얻고 있다. 공화당 내 극보수진영인 티파티 추종자를 비롯해, 공화당과 민주당 주류에서도 자유방임주의 지지 여론이 커지고 있다. 지난 1월 14일 여론조사기관 갤럽에 따르면, 미국인의 23%가 자유방임주의의 가치에 동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0년에는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가 자본의 독점과 빈부격차를 낳고, 결국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위협했다는 점에서 기술기업의 이런 움직임이 기술독재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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