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에너지 정책의 초점을 경제성장과 산업 경쟁력에 맞추면서 재생에너지 정책에서 후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2일 브뤼셀에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2030년까지 시행할 정책들을 하나로 정리한 ‘2030 기후에너지정책’을 발표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새로운 국제 협약을 마련하는 2015년 파리 유엔기후변화회의를 앞두고 가장 먼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발표했지만 과거처럼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책을 주도했던 자신감을 찾기는 어려웠다.
유럽연합의 ‘2030 기후에너지정책’은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 배출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40% 감축하고, 전체 에너지 생산에서 재생가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을 27%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셰일가스 채굴에 관한 최소한의 환경 기준도 마련키로 했다.
22일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 앞에서 ‘지구의 친구들’ 회원들이 ‘2030 기후에너지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브뤼셀/AP연합뉴스
이번 ‘2030’안은 유럽연합이 지난 2007년 발표한 ‘기후에너지정책 2020’에서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탄소배출량을 20%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비율과 에너지효율을 각각 20%씩 증가시킨다는 ‘20-20-20’ 계획의 뒤를 잇는 것으로, 오는 3월 20~21일 열리는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논의한 후 유럽의회의 토론과 승인을 거쳐 시행된다.
유럽연합은 ‘2030’ 계획이 경쟁력 확보와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기후변화 대책은 지구의 미래를 위한 중심 과제이며, 유럽의 에너지 정책은 경쟁력을 위한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며 “이 계획이 야심차면서도 현실적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재생가능 에너지 목표치에 국가단위 구속력 부여 실패
새 기후에너지정책은 이전 계획보다 목표치가 상향되어 겉으로는 일견 진전되어 보인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 보면 후퇴로 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가장 큰 후퇴는 재생에너지 분야이다. 집행위원회는 재생에너지 비율 목표치를 회원국 차원이 아닌 유럽연합 차원에서 구속력이 있는 형태로 도입했다. 국가별 구속력 부여 여부는 협상 당시 가장 첨예하게 이해가 갈렸던 지점이다. 국가별 자율에 맡기면 독일과 같은 일부 재생에너지 분야 선도 국가들에 무임승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단체들이 집행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한 방식이기도 하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재생에너지 비율 목표를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설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과 스페인은 2007년 제안된 20% 외에 새로 재생에너지 목표치를 설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영국은 재생에너지 도입에 돈을 쓰기보다 값싼 원자력과 셰일가스에 투자하길 원하고 있다. 영국은 중부 링컨셔 지역에서 셰일가스 채굴사업을 시작해 내년부터 상업채굴에 들어가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처음으로 남서부 서머셋주에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원자력발전소를 2022년까지 폐기하고, 2050년까지 에너지 수요의 8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에너지 전환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이 있는 한 유럽 차원의 재생에너지 목표치는 손쉽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별 구속력이 없다면 실질적으로 다른 국가들은 재생에너지를 도입할 유인이 부족한 상황이다. 때문에 이미 200억 유로가 넘는 보조금을 재생에너지 분야에 투입한 독일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30%까지 늘리자고 주장해 왔다.
양측간의 의견대립이 치열해 계획안 합의는 협상 시한인 22일 오전 11시를 40분을 넘겨서야 타결됐고, 결국 타협책으로 재생에너지 목표치를 27%로 설정하되 국가별 구속력은 없는 방식을 택했다.
에너지효율은 2030년까지 25% 증가시키기로 했다. 이는 ‘2020 계획’에서 명시한 20%보다는 높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지침으로 바뀌었다. 2030 계획은 셰일가스 개발 시 최소한의 안전기준을 제시하면서 사실상 셰일가스 개발을 허용했지만 안전기준은 강제적이지 않다. 40%의 탄소배출 감축 목표도 환경단체들은 지구 온난화를 막기에는 크게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미 2020년까지 탄소 배출을 1990년 대비 25%까지 감축할 수 있어 40% 이상을 설정할 여력이 있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입장이다.
유럽연합의 새 기후에너지정책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영국과 산업계 쪽은 만족하는 분위기다. 에드워드 데이비 영국 에너지기후변화 장관은 “유럽이 탄소 감축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로 일보 전진한 것”이라며 “가장 비용효율적인 방식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할 유연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환영했다.
반면 환경단체와 재생에너지 산업계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에너지절약유럽연맹의 회장 모니카 프라소니는 “유럽에 슬픈 날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거대 에너지 회사와 에너지 집약산업의 집요한 로비에 굴복했다”며 “유럽의 기후변화 대응과 경쟁력이 재앙을 맞게 됐다”고 말했다. 그린피스 실무대표 마히 시데리도는 “2030 계획은 재생에너지 산업 부흥의 바람을 잠재웠다”며 “유럽 시민들은 녹색 일자리가 더 줄어들고, 비싼 화석연료를 더 많이 수입하면서 수명이 더 짧아지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로 ‘그린 유럽’ 후퇴 조짐
유럽의 기후에너지정책이 후퇴한 이유는 경제위기라는 변화된 상황 때문이다. 유럽의 실질 GDP는 2007년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면서 정부나 민간 모두 재생에너지 도입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된다. 특히 비싼 에너지 비용으로 산업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기후에너지대책과 함께 발표한 ‘유럽 산업 부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같은 날 발표된 에너지 비용을 분석한 보고서는 유럽연합과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경쟁 산업국 간의 에너지 가격 격차가 갈수록 커지면서 유럽의 산업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연합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보다 2배 이상 비싸며 중국보다는 20%가량 높은 수준이고, 산업용 가스 가격은 미국과 러시아의 3∼4배, 중국보다는 약 12%가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국과의 에너지 비용 격차가 위험수준에 달하자 유럽이 탄소배출 감축을 선도해선 안 되며 값싼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의 올리비에 게덴은 “야심차게 목표와 시한을 정했으나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며 “(유럽에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낙관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2일 사설에서 “유럽의 비싼 에너지 비용이 경제성장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유럽이 여타 국가보다 더 높은 탄소배출 감축량을 목표로 세워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탄소배출권 거래시장이 사실상 붕괴한 것도 유럽의 그린 정책 위기를 보여준다. 경제위기로 탄소배출권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면서 유럽연합 탄소배출권 거래제(ETS)의 배출권 가격은 톤당 18유로에서 5유로로 떨어져 기업들이 탄소배출을 줄일 유인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 때문에 ‘2030’ 계획은 탄소배출권거래제도(ETS)에 2021년부터 배출권 가격 자동안정화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재생에너지 도입을 주도하던 독일도 재생에너지 보조금을 줄이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21일 “유럽의 기후변화 목표치가 산업에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며 풍력발전 분야에 지급해온 보조금을 kwh(킬로와트아워)당 0.09유로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의 신규 건설도 연간 2500㎿로 제한하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에너지 보조금을 주기 위해 에너지세를 걷으면서 전기료가 비싸져 기업 부담이 커졌다. 또 돈을 내지 못해 단전되는 가구가 늘면서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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