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제대를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평소 흠모해 오던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던 아리랑. 그 이후 줄곧 한번 읽어봐야지 하다가 결국 책값이 9000에서 15000으로 오른 뒤에서야 보게 되었다. 너무 오래 묵혀뒀나 보다. 게으름이 하나의 이유였고 더 이상 빨간 색깔의 책은 읽고 싶지 않아서 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책이길래 추천해 주셨을까 알고 싶었다.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은 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을 다룬 책이다. 혁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20세기 초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던’ 격동의 시기에 혁명은 억압받는 자는 그 누구나 꿈꿔왔던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간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우파 민족주의자의 항일 운동은 많이 들어왔지만 좌파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중국에서 만주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아야 그들 덕에 독립된 나라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는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인 김산은 이들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 중의 하나이다. 불과 32세에 생을 마쳤지만 지금 시대의 누구도 감히 견뎌내지 못할 죽음과 삶의 고개를 넘는 진정 불꽃같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가장 감명 깊게 느꼈던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바햐흐로 죽음을 앞두고 조국, 그대를-그대의 아름다운 강과 사랑스런 푸른 산을-떠올려 본다. 그대의 자식은 나약하지만 삼천리강산은 강하다. 우리가 모두 이국땅에서 죽더라도 삼천리강산만은 살아남으리라. 나는 내 피를-절망의 독이 스며있는, 결핵균이 섞인 썩어 문드러진 내 피까지도-가지고 돌아가 내가 태어난 땅을 비옥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대를 위하여,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느라고 내 몸은 망가져버렸다. 은혜를 모르는 낯선 이국땅에서 한줌의 비료가 될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는 혼마저도 죽어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를 조속하게 깨끗이 끝장내는 일뿐이다. 죽으려는 의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살려는 의지는 사라져 버렸다. 건강과 힘과 신념과 용기가 충만하던 영웅적 시절의 친구들이여, 나를 옛날 그대로 기억해 주시오. 광둥코뮌에서도, 하이루펑에서도, 만주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주시오. 내 일부는 그런 곳에서 죽었고 일부는 그 어느 곳에도 묻히지 못한 채 쓰러져 있소. 이 너저분한 방에서 죽는 것은 오직 심장과 의지뿐이오. 그 나머지는 전투를 하다가 영광스럽게 희생되어 당신들과 인류를 위한 새 희망을 만들어 냈던 것이라오.” (p.393)
첫 번째 체포 이후 그를 첩자로 몰았던 같은 조선인의 음해를 받으며 민족해방과 인류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도 독버섯처럼 존재하는 개인적 증오 앞에서 느껴야 했던 정신적 좌절감,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육체적 절망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던 심정을 표현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 파시스트 정부와의 전쟁 속에서 어느 때 어느 자리서 죽을지 모르는 그의 유언이리라.
중국 공산혁명이 조선 해방을 위한 디딤돌이라 생각했던 그는 생의 절반을 중국 공산 혁명과 조선 해방을 위해 싸워왔다. 그 와중에 그는 두 번의 체포와 고문을 통해 건강을 잃었으며 혁명의 장애물이라 여겼던 사랑을 얻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광둥꼬뮌 이후 수많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친구를 얻고 잃는다. 미쳐야 정상일 고통 속에서도 그는 다시 일어선다. 다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조직을 재건하고 본격적인 항일 전선을 구축하려 한다. 하지만 미처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그는 ‘은혜를 모르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다.
‘배신으로 혁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슨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개개인을 계급의 적 이상으로 뛰어나게 또 훌룡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지도자의 타락은 우리의 목적을 파기해버릴 것이다. 변절과 음모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설령 우리의 사업이 달성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직하게 죽는 편이 더 낫다.’
두 번째로 체포되어 전향을 강요받을 때의 독백이다. 정의로운 목적이 부당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과연 그러한 목적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상황에서도 실천 가능한 것일까. 지식인은 결정적 순간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 쉽다는 김산 자신의 말마따나 우리 지식인들은 너무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무력함은 과거 수많은 역사의 변절자들이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의 변절은 결국 힘이 승리한다는 부정의의 명제를 독감처럼 퍼트렸으며 그들을 믿고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케 만드는 악이었다. 하지만 김산은 그 자신이 그 누구에 못지않은 지식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다. 시대를 잘 타고난 우리들에게 행여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라 믿고 싶지 않지만 변절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듯이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정규교육을 충실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우리의 해방이 일제에 빌붙어서 제 민족을 핍박하며 자기 배를 찌우던 사람들이 이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방된 조국에서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갈 독립운동가들이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일제의 압잡이였던 사람의 손에 다시 잡히고 고문당하고 죽음과 전향을 강요받는 피가 거꾸로 솟는 역사의 진실을 알 것이다.
수많은 뛰어났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혁명가들이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고 그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민족의 변절자들이 지배한 남쪽에 의해 조국해방과 인류해방의 대의를 독재의 수사로 사용했던 북쪽에 의해. 이제는 기억하고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 거친 산을 넘어 넘치는 강을 건너 인간의 해방을 위해 한 발자국씩 전진해오다 비명도 없이 사라진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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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삶 하지만 영원히 노래될 삶>
본명은 장지락. 1905년 3월 10일 평북 용천 출생. 3.1 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고학한 후 만주로 옮겨가 삼원보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15세에 입학함. 이후 학업과 혁명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남. 1920년대 초 의열단에 가입하며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로 기움. 1923년 이후 공산주의운동에 투신. 1927년 광둥꼬뮌, 하이루펑 소비에트 참여, 1930년 33년 두 차례 일본에 체포됨. 1934년 이후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의 민족전선 구축을 통해 직접적으로 조선 혁명을 이뤄내려 함. 1937년 옌안에서 대기하던 중 님 웨일즈와 만남. 1938년 그토록 헌신했던 중국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스파이라는 부당한 죄명으로 처형됨.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자격을 회복하는 복권을 결의함. 200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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