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고 있는 2010년과 나의 2010은 다르다. 당신은 괜찮은 직업을 갖고 이제 행복한 결혼을,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맞이 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2010년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이틀째 계속되던 쟃빛 비구름이다.
하루키의 1Q84는 같은 시간 속에 다른 공간이 있음을, 같은 공간 속에 다른 시간의 기억이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이라는 되돌아갈 길이 없는 시간의 고속도로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비상구로 자신만의 세상에 다다를 수 있다. 아오마메처럼. 마치 같은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바다를 보더라도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인 것처럼. (김연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 어딘가에 그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길, 자신과 닮은 사람, 자신과 닮은 영혼이 있길 희망할 뿐이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감시와 기만으로 가득찬, 모든 권력이 당에 집중된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84년의 세상은 하나이다. 그래서 Q란 불필요하다.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모습은 그래도 한정된 의미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개별성을 강조한 것이 하루키라면 개인의 삶이 사회에 의해 결정됨을 보여주는 것은 조지 오웰이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하루키에게서는 리틀 피플로 바뀐다. 리틀 피플이란, 리틀 맨과 같은 표현이라면, 그 사전적인 의미는 평범한 사람이다. 빅브라더와는 정반대일 듯하다. 그러나 못할 것이 없어 보이는 존재, 초자연적 존재로 그려지는 리틀 피블이란 결국 개별적인 존재로서는 평범하지만 전체로서는 신의 영역을 넘볼 만큼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인류와 같다. 초자연적으로 변한 빅브라더, 개별적이지만 총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와 오웰이 각각 개별성과 총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부분도 많다.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1Q84에서 아오마메가 덴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듯이 1984에서도 줄리아는 윈스턴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리틀맨의 충실한 대리인이자 죽음으로써 그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종교단체 지도자는 1984에서 사상경찰인 오브라이언과 저항자 윈스턴의 유전자를 합해놓은 듯하다. 내용면에서도 사회주의 이상이 전체주의로 변질된 오웰의 1984처럼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1960년대 일본의 극좌파 학생 운동이 개인 숭배의 종교적인 전체주의의 모습으로 변질되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오웰과 하루키가 강조하는 바는 다르다. 오웰의 1984는 감시와 통제를 통해 개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권력의 출현을 경계하는 목적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묵직한 목적 의식 자체가 없다. 다만 해체된 세상을 보여줄 뿐이다. 1984가 현실의 추악함과 부정함을 폭로하는 표현주의의 그림에 비견된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현실의 이미지를 여러 인물들의 관점에서 잘나내고 붙여내는 작업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점에서 피카소의 그림에 유사하다.
세부적인 묘사에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까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하루키라면 감동적인 대사와 깊은 교훈을 통해 생각할 것을 안겨주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개인적 취향으로 하루키의 큐비즘이나 인상주의보다는 조지 오웰의 표현주의가 더 의미있었다.
하루키의 1Q84는 같은 시간 속에 다른 공간이 있음을, 같은 공간 속에 다른 시간의 기억이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이라는 되돌아갈 길이 없는 시간의 고속도로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비상구로 자신만의 세상에 다다를 수 있다. 아오마메처럼. 마치 같은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바다를 보더라도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인 것처럼. (김연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 어딘가에 그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길, 자신과 닮은 사람, 자신과 닮은 영혼이 있길 희망할 뿐이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감시와 기만으로 가득찬, 모든 권력이 당에 집중된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84년의 세상은 하나이다. 그래서 Q란 불필요하다.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모습은 그래도 한정된 의미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개별성을 강조한 것이 하루키라면 개인의 삶이 사회에 의해 결정됨을 보여주는 것은 조지 오웰이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하루키에게서는 리틀 피플로 바뀐다. 리틀 피플이란, 리틀 맨과 같은 표현이라면, 그 사전적인 의미는 평범한 사람이다. 빅브라더와는 정반대일 듯하다. 그러나 못할 것이 없어 보이는 존재, 초자연적 존재로 그려지는 리틀 피블이란 결국 개별적인 존재로서는 평범하지만 전체로서는 신의 영역을 넘볼 만큼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인류와 같다. 초자연적으로 변한 빅브라더, 개별적이지만 총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와 오웰이 각각 개별성과 총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부분도 많다.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1Q84에서 아오마메가 덴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듯이 1984에서도 줄리아는 윈스턴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리틀맨의 충실한 대리인이자 죽음으로써 그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종교단체 지도자는 1984에서 사상경찰인 오브라이언과 저항자 윈스턴의 유전자를 합해놓은 듯하다. 내용면에서도 사회주의 이상이 전체주의로 변질된 오웰의 1984처럼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1960년대 일본의 극좌파 학생 운동이 개인 숭배의 종교적인 전체주의의 모습으로 변질되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오웰과 하루키가 강조하는 바는 다르다. 오웰의 1984는 감시와 통제를 통해 개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권력의 출현을 경계하는 목적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묵직한 목적 의식 자체가 없다. 다만 해체된 세상을 보여줄 뿐이다. 1984가 현실의 추악함과 부정함을 폭로하는 표현주의의 그림에 비견된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현실의 이미지를 여러 인물들의 관점에서 잘나내고 붙여내는 작업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점에서 피카소의 그림에 유사하다.
Käthe Kollwitz, Need, from A Weavers' Revolt (no.1), 1893-1897, lithograph (state II/III), Rosenwald Collection.
Violin and Grapes, Pablo Picasso (Spanish, 1881-1973)
세부적인 묘사에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까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하루키라면 감동적인 대사와 깊은 교훈을 통해 생각할 것을 안겨주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개인적 취향으로 하루키의 큐비즘이나 인상주의보다는 조지 오웰의 표현주의가 더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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