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그러므로 모른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의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연민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이해의 반대말이기도 하며 인간들이 서로 가져야 할 모든 진정한 연대의식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
-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인간은 인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입증되어 가장 바람직한 최선책은, 이로울 것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하기만 한 방법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너희는 지난 수세기 동안 죄인이라고 판결된 사람들을 수천 수만 처벌했으나 과연 죄인이 사라졌던가? 오히려 처벌에 의해 더욱 타락한 죄인과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교도관 등과 같은 죄인들로 하여 더욱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고 있는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 톨스토이, 부활
1. 작가는 자기 상처를 마주할 용기도 없으면서 위악을 행하며 거기서 나의 슬픔을 남들이 알아채 주길 바라는 우리에게 더 깊게 패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더 깊게 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말하기 힘든 비밀스런 슬픔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알면 좀 더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누구나 실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 온통 가짜의 행동만을 하고 사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그러면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곁 일지라도 외로움은 언제나 느낀다.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이 언제나 그늘처럼 남아있어 서늘함을 가슴속에 뿌리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진짜로 안다는 것은 그 그늘에 햇살을 비추는 것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그 그늘에 속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밝은 곳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세상은 나에게 따뜻하지 않았다라고 느낄 때, 아름다운 나라라는 환상이 무너질 때 느낄 고통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몫이라고 배웠던 것이 아닐까. 모른다는 말이 혹은 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싶다.
윤수를 만나기 전 유정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귀 기울여 듣는 누군가를 만나본적이 나 역시 아직 없다. 아니 예초에 그럴 일은 생길 수 없었다. 그럴 만큼 나의 이야기를 남에게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다. 나 역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무관심. 타인에 대한, 나에 대한. 그래서 조금은 고쳐 볼려고 한다. 우선 나에 대한 무관심부터. 그래서 난 내가 생각한 거, 본 것, 읽은 것을 기록하면서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나부터 좀 알고 싶다.
살아있으면서도 조금씩 죽어왔던 그들. 자살을 결행하면서 죽었던 그녀, 한 사람을 죽이는 순간 이미 자신 역시 죽어버린 그. 그와 그녀는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일을 털어놓는 진짜 대화를 나누면서 결국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만이 상처받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나는 남들과 좀 다른 대접을 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불만이라는 것과 같다. 결국 이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유정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어머니 잃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와 같은 모니카 고모의 헌신적 사랑 앞에서, 자기의 딸을 죽인 자를 용서하려는 할머니의 무모함과 그리고 고통을 직시하는 진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변해가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 역시 세상을 용서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용서를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 그 역시 유정과 같은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 수도자적 존재로 부활하게 된다.
이제 나는 모른다라는 것의 정의를 알았다. 그것의 대상인 사랑, 정의, 연민, 이해, 연대의식이 나의 20대의 머리를 지배했지만 그건 얼마나 진정 나의 마음을 지배했을까.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많기에 조금씩 실천해 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것을 통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면 나에게도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언제든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책을 읽으면서 사법제도와 사형제도에 대한 고민을 조금 할 수 있었다. 아래는 모두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발췌한 대목이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에 소개하려 한다.
“우리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된다. …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서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는 이런 사람이라고 쉽게 말한다. 예를 들어 사형수는 죽을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그 사람이 흘러 보낸 세월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그리고 그가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변할지 짐작도 못하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벌주지 않기 위해 열 사람의 죄인을 용서한다는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는 어긋나게 썩은 것을 절단하기 위해 상하지 않은 것까지 자르고 만다. 그리하여 위험한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열 사람도 죄목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었다.”
간첩을 잡기 위해서 하지만 실은 독재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고문과 조작으로 그렇지 않았으면 꽃같은 존재로 수많은 일을 했을 많은 사람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죽였다. 75년 4월 9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고서 하루도 채 되기 전 20여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리게 한 소위 '사법살인' 이었던 인혁당 사건은 그 대표격이다. 그 때의 법관 중 한명은 출세가도를 달려 대법관에 오르고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모른다면 더 슬픈 일이겠지만.
나는 열 사람의 죄인 중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처는 가해자를 죽여서 복수한데도 아물지 않는 거라는 점에서 예방과 검거 노력을 게을리 한 뒤 사형을 통해 뒤늦게 국가의 책임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주는, 통계적인 근거도 없는 범죄억지이론에 근거한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김영삼 정권 말기에 23명을 갑잡스레 집행한 이후 김대중 정부 이후 아직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는 87개국이며 우리 나라 처럼 MORATORIUM을 선언한 나라를 포함하면 122개국이 사형제도를 폐지 혹은 유예하고 있다. 2005년 현재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는 22개국이다. 미국,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중국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 연합은 우즈베키스탄과 벨라루시를 제외하곤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미국만이 유일하게 사형을 주기적으로 집행하는 나라이다. 아시아는 아직 사형제가 유지되는 나라들이 많지만 최근 2006년 6월 필리핀이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한국을 아시아에서 사형제 폐지의 의지를 갖는 나라로 보고 폐지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일반 범죄자로 불리는 이들은 다섯 종류로 나뉠 수 있다. 제1은 오심으로 무고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제2는 분노라든가 질투심, 아니면 취기 등의 어떤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 제3은 자신들은 자기 행위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법을 내세워 범죄 행위로 단정하여 수감된 이들, 제4는 정신적인 면으로 일반 사회의 평균 수준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로서 수준이 높다는 이유로 이들 부류에 낀 사람들, 제5는 사회에 대한 범죄자의 죄보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 사회는 단지 지금 이들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전 세대, 다시 말해 이들의 부모나 그 조상들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이다.”
몸이 갇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번 주는 내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 제4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사람들은 정치범이다. 새삼 몇 해 전 푸른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서 자신의 옳았음을 굽히지 않았던 나의 선배를 생각해본다. 그녀가 틀렸던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녀는 남들의 믿음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용기가 있었다.
때론 갇힌 몸이 더 자유로운 영혼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에 얽매여 있는가. 일단은 살아있음에 연연해야 하고 그리고 행복한 가정 풍족한 생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서는 내가 아닌 남들이 옳다고 좋다고 여기는 질서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리고 윤수 같은 사형수는 제5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죄를 물으려면 우선 술주정뱅이에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던 그의 아버지를 벌해야 하고 마지막 기댈 곳이 되기를 거부했던 그의 어머니를 탓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윤수의 부모 역시 폭력과 무관심의 피해자였을 뿐이다. 실상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지 못했던 사회의 책임이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특성, 사랑과 동정을 품을 줄 모르는 인간을 본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나는 왠지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정말로 그들이 두렵다. 강도보다도 더. 강도에게는 그래도 연민을 바랄 수도 있으나. 그들은 인간에 대해 연민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식물의 생장력을 마비시키는 돌과 같이 연민의 감정이 조금도 없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바다.”
자신의 재산을 사형수의 영치금으로 다 쓰고 장례비만 남기고 죽은 어느 독거 노인의 장례식장. 독실한 신자인듯한 전직 교도소장의 범죄자는 단지 골칫거리일 뿐이라는 듯한 말투, 교도행정의 편의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영화에서 보았던 제복입은 사형집행인들의 무뚝뚝한 말투와 무표정한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 사람이 이런 것이구나 보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제도의 문제라는 것을. 어쩌면 그들도 일상에서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넘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적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숫자로 불러야 하는, 짜여진 법규와 규정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에 자신도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람의 숨결을 경멸하는 제도의 문제이다.
“이런 모든 제도는 마치 다른 환경에서는 찾을 수 없는 철저한 타락과 악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철저한 타락과 악덕을 민중들에게 옮겨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것과도 같았다. … 해마다 수십만의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도달해 완전히 타락해 버리면 그동안 완성한 타락을 온 민중에게 만연시키기 위해 석방되는 것이다.”
어쩌면 유기수가 아닌 사형수의 경우에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어서 아니 그보다 더한 성인이 없을 만큼 변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만한 존재가 되면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며 우리의 향락을 위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어리석은 착각 속에 살고 있으나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졌다면 그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 보내졌음이 분명하다.”
나의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신을 저주하며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은 결국 말그대로 자신에 대한 살인일 뿐이다.
p.s. 영화를 봤다. 조금은 다른 구성, 다른 대사였지만 책을 읽으면서 울컥했던 마음 한 구석이 영화를 보면서 끝내 터졌다. 주책없이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사실 몸을 떨었던 적이 예전에 있었나 싶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가 아직 가슴이 메마르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내가 아직은 슬프면 그렇다고 표현할 정직함이 있다는데 자기 만족감을 느꼈다. 누군가 그랬다. 눈물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이라고. 가끔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내 안의 따뜻한 감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의 눈물과 그러한 자신의 미덕에 감동하는 속물적 눈물이 함께 섞여 있어 짜고 비릿한 것이라고. 사실 난 눈물을 맘놓고 흘리지 못하겠다. 내 눈물이 그 한순간만 착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까지의 무관심에 대한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물이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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